아이카와 금은산 발견의 계기가 된 은산
쓰루시 은산은 아이카와 금은산의 약 1.2㎞ 남쪽에 위치한 광산 유적입니다. 1542년부터 1946년까지 채굴이 계속되었습니다.
1589년에 에치고 지방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사도를 점령하여 지배하게 되자, 쓰루시 은산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은산 경영을 통괄하게 하였습니다. 우에스기 가문의 사도 지배로 인해 광산 개발은 대규모화되었습니다.
쓰루시 은산에서는 16세기 중엽에 지표 근처의 광석을 채굴하는 ‘노천 채굴’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이와미 은광에서 온 광산 경영자에 의해 ‘갱도 채굴’이 전해져 복수 광맥의 동시 채굴 및 갱내의 배수가 가능해져, 은의 산출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채굴, 선광, 제련 등이 분업으로 행해지게 되었는데, 분업화에 의해 작업 효율성이 높아졌으며, 은을 채굴하기 위해 많은 광산노동자가 각지에서 몰려들어 광산노동자 마을과 물자를 반입하는 사와네항이 정비되어 ‘쓰루시 센겐’이라 불리는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쓰루시 은산의 발견 및 개발은 섬 내의 광산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이카와에서 대규모 금은 광맥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이카와 금은산의 발견으로 인해 사도의 금은산의 중심은 점차 아이카와로 옮겨갔으며, 1603년에 광산 경영의 거점이었던 쓰루시의 지방관 집무소(관공서)가 아이카와로 이전하자, 광산노동자도 점차 아이카와로 옮겨갔습니다.
햐쿠마이다이라 지구의 대규모 노천 채굴 터
쓰루시 은산에서 초기에 개발된 곳이라 전해지는 채굴 장소로, 지표 근처의 광석을 파낸 대규모 ‘노천 채굴’ 터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햐쿠마이다이라(百枚平)’라는 명칭은 한 달에 은 100닢을 세금으로 바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집니다. (국가사적)
뵤부사와 지구의 히오이 채굴 터
뵤부사와 지구에는 골짜기를 따라 드러난 광맥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 채굴한 ‘히오이 채굴’의 흔적이 잘 남아 있습니다. (국가사적)
오타키마부
에도시대의 기록과 지도에도 등장하는 쓰루시 은산을 대표하는 갱도 채굴의 한 곳입니다. 로봇으로 갱내를 탐사한 결과, 에도시대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상태로 남아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국가사적)
지방관 저택터
16세기 말에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사도의 금은산을 지배하기 위해 이곳에 지방관 집무소를 설치하였습니다.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아이카와에 사도 봉행소가 세워질 때까지 사도의 광산 경영의 중심이었습니다. 지방관 집무소 부지 내에서는 관청의 건물과 광석의 선광장, 화로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국가사적)
쓰루시 아라마치 유적
쓰루시 은산의 촌락은 지방관 저택 근처에 형성되어 선광 및 제련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은산의 번영에 따라 급증한 인구에 대응하기 위해 거주 지역이 순차적으로 확대되어 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정하지 않은 형태의 테라스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촌락 내에 간선도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국가사적)
3가지 채굴 방법
노천 채굴
산의 표면에 드러난 금과 은이 섞여 있는 광맥을 토사째 채굴하는 방법. 크레이터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히오이 채굴
지표에 드러난 광맥을 따라가며 불규칙하게 채굴해 가는 방법.
그로 인해 채굴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개발되었습니다.
갱도 채굴
사전에 광맥이 어디에 있는지 조사하고, 산 옆으로 갱도를 파 땅속의 광맥을 향해 가는 방법. 이 방법을 사용하면 2개 이상의 광맥을 동시에 파낼 수 있어서 효율이 좋아졌습니다. 또한 옆에서 채굴해 나가기 때문에 빗물이 고일 걱정도 없었습니다.
쓰루시 은산에는 노천 채굴 터 556기, 히오이 채굴 터 4기, 갱도 채굴 터 108기의 채굴 터가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