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금은산은 가이 지방의 금산과 이와미 은광의 기술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광석에서 금화가 만들어질 때까지의 사도의 광산 기술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에도시대의 광산기술
1광석을 채굴한다(채광)
광석을 채굴하는 방법의 초기 단계는 산의 표면에 드러난 광맥을 토사째 파내는 ‘노천 채굴’이 주체였습니다. 사도 금은산의 상징인 ‘도유노와리토’도 노천 채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표에서 깊게 파고들어갈 수 없게 되자, 산의 옆쪽에서 터널(갱도)을 파는 ‘갱도 채굴’이라는 기술이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아이카와 금은산의 광석은 매우 단단하여 하루에 약 10㎝ 정도밖에 파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갱도를 수평으로 파들어가려면 고도의 측량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측량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갱도가 깊어지면 용수가 고이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용수를 효율적으로 배수하는 도구, 스이쇼린 펌프가 도입되었는가 하면, 목재를 사용해 갱도 내의 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야마도메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광석은 가나호리다이쿠 인부가 ‘다가네’라는 채굴용 정을 우에다바시 집게로 잡고 망치로 쳐서 파냈습니다. 우에다바시 집게로 잡았기 때문에 짧아진 정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광석이 단단했기 때문에 목수 1명이 정 하나를 이틀 동안 사용하면 마모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갱도의 환기에는 쌀 선별 작업에 사용되는 ‘풍구’도 사용되었습니다.
배수 기술
갱내에서의 채굴은 항상 물과의 전쟁이었으며, 배수는 갱내 노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오래전에는 두레박이나 스포이트의 원리를 이용한 스폰도이(寸法樋: 양수기)가 사용되었지만, 효율적인 배수를 위해 1653년에 스이쇼린(水上輪) 펌프가 도입되었습니다.
스이쇼린 펌프는 통 내부에 설치된 ‘나선형’ 판자가 회전하면서 물을 빨아올리는 배수 도구입니다. 아르키메데스 펌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중국을 거쳐 에도시대에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2광석을 선별한다(선광)
채굴한 광석은 세리바로 운반하여 쇠망치로 깨뜨린 뒤, 맷돌로 더욱 잘게 갈아 모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수조에 넣고 유리이타 거름판으로 흔들어 가벼운 모래와 무거운 금은 가루를 분리하여 회수하였습니다. 남은 모래에도 금은 가루가 약간 남아 있었기 때문에 ‘네코나가시’라는 공정을 거쳤습니다. 미끄럼틀 같은 형태의 나무틀에 목화 천을 깔고, 그 위에서 모래를 흘려보내 금은 가루를 부착시켰습니다. 이 작업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금은을 회수하였습니다.
사도에서 광석을 갈 때 사용했던 맷돌은 암맷돌과 숫맷돌의 석질을 바꾸어 효율적으로 갈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암맷돌은 후키아게 해안 채석장에서 구과상 유문암을, 숫맷돌은 가타베·가노우라 해안 채석장과 섬 내의 다른 채석장에서 역암을 잘라내 만들었습니다.
금의 회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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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쇠망치로 광석을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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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깨뜨린 광석을 맷돌로 더욱 잘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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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갈아낸 광석을 물과 함께 아래에 깐 천 위로 흘려보낸 후, 천에 부착된 금을 회수한다. (네코나가시)
후키아게 해안 채석장 터
광산용 맷돌의 암맷돌의 석재 채석장에서, 근세부터 근대에 걸쳐 장기적으로 채석이 행해졌습니다. 해안선의 암석 지대에는 쐐기구멍 자국이나 정으로 내려친 흔적 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제련
제련 작업은 ‘도코야’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행해졌습니다. 먼저, 세리바에서 회수한 금은과 납을 함께 숯불로 녹여 금은과 납의 합금을 만듭니다. 이어서 이것을 재를 채운 철냄비에 넣고 가열하면, 납이 재에 스며들어 금은만 남게 됩니다. 이 작업은 ‘회취법’이라고 하며, 이와미 은광에서 전해졌습니다. 이 금은의 합금을 금과 은으로 분리한 방법으로는, 유황을 첨가하는 ‘유황분은법’과 소금을 사용하는 ‘야키킨법’ 등 2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를 조합하여 4∼5번 되풀이하는 것으로, 금의 순도는 금화의 품위(66∼87%)에 맞추어 높일 수 있었습니다.
사도의 야키킨법에 대해서는 사도 봉행소 터에서 출토된 화로 터와 토기 등에 더해, 작업 순서를 기록한 기술서와 두루마리그림 등의 사료들도 남아 있어서 당시의 조업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야키킨법의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일본 국내에서도 남아 있는 곳은 사도뿐입니다. 선광소(選鉱所: 세리바)와 제련소(도코야)는 아이카와 마을 도처에 흩어져 있었지만 산출량의 감소 및 조업 관리를 위해, 1759년에 당시 사도 부교였던 이시가야 기요마사가 봉행소 내에 세리바와 도코야를 한데 모아 요세세리바, 요세토코야로서 효율적으로 관리 및 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련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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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선광 공정에서 얻은 금이 함유된 광석 가루에 납을 첨가하여 합금(귀연)으로 만들어 불순물을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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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철냄비에 재를 깔고 재 위에 귀연을 얹어 가열하면, 먼저 납이 녹아 재에 스며들어 금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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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쇄금:
회취법으로 얻은 금을 잘게 부순다. -
04.소금을 섞는다:
잘게 부순 회취금과 소금을 섞어 원통형으로 굳힌다. -
05.원통형의 덩어리를 토기 사이에 끼우고 화로 속에 늘어놓고 주위에 숯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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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장시간 계속 가열하면, 은과 소금이 반응하여 염화은이 되고 금과 분리된다.
※진 오른쪽写真下:사도 봉행소의 야키킨 화로 터 -
07.물속에서 부순다:
구운 덩어리를 수조에 집어넣으면, 염화은은 물에 녹고, 금만 침전한다.
금화 제조
아이카와에서는 광석에서 금은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금화 제조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섬이라는 격리된 지리적 조건과 봉행소에 의한 일괄적인 관리 체제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광석 채굴에서 금화 제조까지 일괄적으로 채굴지에서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극히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금화는 봉행소 옆에 있었던 ‘고반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먼저 금을 녹여 널판지 모양으로 만든 것을 가위로 금화 1닢 무게로 자르고, 망치로 두드려서 금화 모양으로 만든 다음 ‘고자메’라는 무늬를 넣습니다. 그 다음 표면에 약품을 칠하고 열을 가하는 작업인‘이로아게’를 통해, 더욱 좋은 ‘황금색’으로 만들어 완성하였습니다.
사도의 금화는 금은과 함께 엄중한 경호 가운데 매년 에도까지 운반되었습니다. 아이카와에서 오기, 오기에서 선박에 실려 강 건너 이즈모자키로 운반된 후, 홋코쿠 가도에서 나카센도를 경유하여 에도로 운반되었습니다.
메이지시대 이후의 광산 기술
"메이지시대 이후는 광석을 채굴하는 기술도 기계화되었습니다. 손으로 파던 것을 대신해 착암기와 화약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배수에도 펌프가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광석은 트롤리나 로프웨이로 운반되어 선별된 후, ※도광기로 잘게 분쇄되었습니다.
광석에서 금과 은을 추출하는 제련의 경우는 메이지시대 초기에는 금과 은이 수은에 녹아 아말감이 되는 성질을 이용하여 회수하는 ‘혼홍법’이 사용되었지만, 메이지시대 후반에는 청산화합물에 금을 녹여서 회수하는 ‘청화제련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쇼와시대 초기에는 금은을 회수하고 남은 찌꺼기 등을 부유제와 혼합하여, 거품과 함께 떠오른 미세한 금은까지 회수하는 ‘부유선광법’이 개발되었습니다."
※도광기⋯철로 된 공이로 광석을 깨뜨리는 기계
아이노야마 도광장
광석을 분쇄하고 수은을 사용하여 제련하는 시설로, 1891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시설 덕분에 종래에는 폐기되었던 광석에서 금은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