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부터 가동된 일본 최대의 금은산
아이카와 금은산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일본 최대의 금 산출량을 자랑한 광산으로,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 중엽에 걸쳐서는 국가가 관리하였습니다. 산출된 금은 모두 화폐로 이용되어 오랫동안 국가 재정을 지탱하였습니다. 메이지시대에 기계화되어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오래전의 유적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 장기간에 걸친 금 생산 기술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자산이 남아 있습니다.
에도시대
아이카와 금은산은 쓰루시 은산의 광산 경영자들이 새로운 광맥을 찾아 아이카와의 산으로 들어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에도시대를 통해서 금은 약 40톤, 은은 약 1,800톤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은산이었습니다. 아이카와에서 금과 은이 채굴되자, 섬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바닷가에 십수 채의 집밖에 없었던 아이카와의 인구는 한때는 5만명까지 증가했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광산과 가까운 가미아이카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을이 생겼고, 뒤이어 바다에 인접한 평지 끝에 세워진 사도 봉행소를 중심으로 교마치, 고메야마치, 미소야마치 등 직업별 마을이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기 때문에 쌀과 목재, 의류 등,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유입되었습니다. 한편, 사도섬 내에서도 광산용 물품의 생산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갱도를 채굴하기 위한 기술과 측량 기술 등을 이용하여, 섬 내 각지의 해안단구와 중산간지에서 농작지 개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아이카와 금은산에서 산출된 금의 일부는 니시미카와의 사금과 함께 아이카와에서 금화로 가공되어, 은과 함께 오기항에서 에도로 운반되었습니다. 막부는 이 금과 은을 자금으로, 정치 및 외국과의 무역을 펼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이 되자 점차 양질의 광석이 줄어들게 되었고, 갱도도 깊어지면서 솟아나는 물을 처리하는 것도 어려워졌으며 금과 은의 생산량도 크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광산을 부흥시키기 위해 신기술의 도입이 필요해짐에 따라, 배수용 갱도를 굴착하거나 배수도구의 개량을 통해 회복시켰지만,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새로운 광맥이 발견되지도 않아 광산은 점차 쇠퇴해 갔습니다.
도유노와리토
아이카와 금은산의 상징으로, 상부의 노천 채굴 터는 에도시대에 인력으로 파내려간 것으로 깊이 74m, 폭 30m에 이릅니다. 하부의 큰 구멍은 메이지시대 이후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채굴한 흔적입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사도 금은산 두루마리그림
채굴에서 금화 제조까지 이루어진 광산은 일본 국내에서도 오직 사도뿐이며, 그 공정을 묘사한 광산 두루마리그림이 국내외에 100점 이상 남아 있습니다. 두루마리그림을 통해 광산 기술과 광산 경영의 변천을 상세하게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금은산의 발전에 공헌한 사도 부교(奉行)
에도시대 전체에 걸쳐 막부에서 파견된 부교는 102명에 달하였습니다. 부교들 가운데 특히 사도 금은산의 발전에 공헌한 부교들에 관해 소개하겠습니다.
오쿠보 나가야스
부교 재직 1603년∼1613년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사도 지방관(이후의 부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사도 부교 이외에 가이 부교나 이와미 부교, 이즈 부교 등도 겸임하였습니다. 이와미 은광의 기술과 경영 방법을 사도 금은산에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카와에 봉행소를 설치하여 계획적인 도시 건설을 실시하였으며 광산으로 이어지는 도로 및 항구를 정비하였습니다. 금은의 산출량은 그때까지 산출된 양 가운데 최고를 기록하였으며, 아이카와는 대단한 활기를 띠었습니다.
1603년에 오쿠보 나가야스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사도의 광산 경영과 행정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000년에 안세이시절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오쿠보 나가야스에 의해 대지 위에 형성된 광산 마을입니다. 금은산과 봉행소를 이어주는 도로 주변에는 에도시대의 상가와 근대의 광산노동자 사택 등, 광산의 발자취를 담은 각 시대의 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국가중요문화적경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 아이카와 금은산의 개발에 따라 형성된 광산 촌락으로, 광산 마을 아이카와의 발단이 된 장소입니다. 에도시대 초기에는 ‘가미아이카와 센겐’이라 불리며 번영을 누렸으며, 22∼23개의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오기하라 시게히데
부교 재직 1690년∼1712년
17세기 후반이 되자, 광석을 채굴하는 장소가 점차 지하로 깊어졌으며, 갱도 내에 용수가 고이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때 사도 부교였던 오기하라 시게히데는 갱도 내에 고인 용수를 바다로 흘려보내기 위해 배수용 갱도를 굴착하였습니다.
약 5년의 시간에 결쳐 땅속의 암반을 손으로 파내어 완성시킨 것이 전체 길이 1.1㎞에 달하는 ‘미나미자와 배수용 갱도’입니다. 이 배수용 갱도가 완성됨으로써 금은의 생산량은 다시 증가하였습니다.
미나미자와 배수용 갱도
"바다까지 약 1㎞에 달하는 길이를 1691년부터 5년에 걸쳐 정과 망치로 굴착하였습니다. 지금도 갱내의 용수를 동해(일본해)로 계속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이시가야 기요마사
부교 재직 1756년∼1759년
공물의 면제와 산업의 육성, 봉행소의 조직 등에 관한 의견서를 막부에 제출하여 대규모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또한 마을 이곳저곳에서 일하던 정련업자들을 봉행소 내로 불러들여 ‘요세세리바(선광장)’를 만들어, 작업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